The giver : 기억 전달자 (계속)



깨알 스포 하나!!

이것은 SF의 탈을 쓴 성인용 동화!!




뒷맛이 있는 영화다.

광고와 포스터는 볼거리 많은 SF물로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라 선택을 했다.


하지만 초반 배경이 되는 미래의 커뮤니티와 use the precise language로서 '언어 순화' 뒤에 가려진 통제를 발견하는 순간 단순한 오락물에 대한 기대는 접었다.


극적 장치는 '조지 오웰의 1984' 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짐케리 주연의 트루먼쇼를 연상하게 했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을 긴호흡과 함께 생각이 많았던 독자라면 재미있게 볼만한 영화가 될것이다.



<잿더미의 무채색에서 시작>

From the ashes of The Ruin,

the Communities were built.


Protected by the boundary


All memories of the past were erased.


use the precise language

wear your assigned clothing

take your morning medication

obey the curfew

never lie


영화는 흑백으로 그려진 미래의 한 지역에서 시작한다.

이미 파멸을 겪은 인류는 모든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정확한 언어'(여기서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들이 사라진듯) 사용

할당된 옷 입기

매일 아침 약물 투여

통금시간 준수

거짓말 하지 않기를 따른다.


<부정적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Jonas, your turn for feelings.

well, I guess sorry of terrified.

-The precision of language.

I mean anxious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통제되어 쓰지 않는다.

걱정이라는 단어로 통일해서 쓴다.


색깔 ,인종, 종교 모두 같게 만들었다.

달랐다면 시기하고 화내고 억울해 하고 증오에 사로 잡힐 수 있으니.


꿈이라는 단어가 없고, 음악이라는 단어도 없고, 춤이라는 단어도 없다.


memories are not the just past, they determine our future, you can change the things. you can make the things better



모든 언어가 통제 되어 있다.

통제되었기에,

살인, 전쟁, 증오, 시기, 차별이 없다.

얼마나 완벽한 세상인가?? 그래서 대론 모든것이 통제된 세상에 대한 동경을 한다.



그심정은 이해한다. 누구나 다 한번쯤 해보았을 법한 상상.

모든것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모든 시나리오가 짜져있고, 사건사고가 없는 이상을.

어떻게 보면 가장 깔끔하고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이것은 '독재'를 찬양하는 어린양들에게 그저 모든것이 하얗고 깨끗하게만 보이는 이유다.

내가 생각하는 장점들로만 작동하는 세상이기에 완전무결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독재나 모든것이 통제된 잘짜여진 시스템으로만 움직이는 사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통제 혹은 독재의 주체가 완전무결해야만 한다는 전제다.

고통과 증오가 없는 사회, 유토피아적 사회건설이라는 미명하에 

다양한 지식과 정보, 가치관에 대한 접근이 차단된 상태에서의 일방통행은 결국 

악의 없는 통제자라 할지라도, 무지의 불완전한 통제자에 의해 실패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도 나오지만

이런 명확하고 확실해 보이는 방법들도

선택권이 박탈된 제한구역 내에서는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구분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살인은 양심의 문제를 떠나게 된다.

(스포일 수 있기에, 영화 보신 분들만 이해 할듯하네요)

바꿔 말해 때론 악이 통제자에 의해 통제된 제한구역 내에서 양심의 문제를 떠나 그냥 일상이 되어 버릴수도 있다.




특히 파피용에서 느꼈던 인간사의 발전과, 헤겔의 그것에 대한 숙제는 영화를 본 지금도 계속 남아 있다.

피라밋처럼 정반합으로 이루어 올라가는, 혹은 발전해 가는 선형적 인간사를 생각할 것인지

정과 반 합이 서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반복 될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 필자도 정반합에 대해 습자지 처럼 얇은 정의만 사전을 참고해 알고 있다.

무지하면 용감하다 했는가? 혹시나 필자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런 생각들을 공유해 보고, 또 필자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는지 생각을 모아 보고싶어 이렇게 글을 쓴다.)


전자의 합은, 인간은 언제나 발전의 곡선을 그리며, 언젠가는 유토피아로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이고, 그렇기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합을 잘 선택해야 하는 문제에 논쟁이 있을 것이고,

폐곡선상의 합은 디스토피아로 갈것인가? 유토피아로 갈것인가의 절대적 답이 정해진 일방향의 흐름이 아닌, 

언젠가는 또 반복되기에, 디스토피아 유토피아가 무의미한, 그저 지금 세태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기에 물 흐르듯 몸을 맡겨 흘러 간다는 의미에서 본 변증법이다.


이미 눈치를 챈 독자도 있을 것이다.

헤겔의 그것은 

칼로 무자르듯 하나를 나누어 놓고 

갈라진 나머지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정과 반의 적절한 조화, 융합이 결국 합인 것인데,


우리는 하나의 극단적 선택을 강요받고 정과 반 둘중 하나를 합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닌지.

적어도 우리 사회는 그런 극단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통제와 개방

제한과 자유

평등과 차이

분배와 성장

경영자와 노동자

하물며 선과 악까지


이 모든것들이 서로 양극에 서있어 방향이 다른듯 보여도

두동강나 합쳐질 수 없는 양자택일의 무가 아닌

정과 반의 대립속 하나로 균형있게 융합되어야 할 단어들이 아닐까??